아빠가 계셨을 때 나를 많이 걱정하셨는데 ‘내가 지금 이렇게 잘 자라는 것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가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?’라는 생각을 해 본다. |
|
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‘가족’이라고 대답한다. 그럼 그 ‘가족’은 무엇인가? 언뜻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.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기에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굳이 그런 질문에 대답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.
‘가족’이란 무엇으로 표현하는 게 맞는 건지 한번 생각해 보았다. 나한테 가족은 한 우산을 쓴 사람들이라 여겨지고, 한 그루의 나무라고도 생각한다. 아니면 무엇으로 표현을 해야 맞는 걸까?
한 우산을 쓴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건, 가족은 우산 속에서 비를 피해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면서 걸어가기 때문이다. 그러기 위해서는 우산을 든 사람을 중심으로 양쪽에 서서 서로 보듬고 어깨를 기대 조심스럽게 걸어가야 한다. 우산 속 가족이 비를 맞지 않고 걸어가려면 우산을 들고 가는 사람이 중심을 잘 잡아줘야 한다. 그 중심에 서서 우산을 손에 든 사람이 우리 가족에겐 아빠다.
가족이 나무라고 생각하는 것은, 땅속에 뿌리인 기둥을 세워 허공에 가지를 뻗어서 잎을 싹 틔우고, 꽃을 피우면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. 한 뿌리에서 자란 가지와 줄기와 이파리가 햇살과 바람을 맞고 각각 다른 모양으로 길을 찾아간다. 나무가 잘 자라려면 뿌리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야 한다. 이렇듯 나와 우리 가족에게 뿌리 역시 우리 아빠다.
어른들이 처음 말하기 시작하는 아기에게 대부분 묻는 질문이 “엄마가 좋아? 아빠가 좋아?”라는 질문이다. 나한테도 그런 질문을 대답해야 할 순간이 다가올 것을 알고 있었다.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말을 별로 하지 않고 내가 놀고 있다는 것도 부모님이 모를 정도로 조용한 아이였다.
언니 두 명도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아서 나랑은 같이 놀아줄 수 없었다. 그리고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노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. 그런데 어느 날 주변 사람들이 나한테 그 질문을 반복해 계속 물었다.
▲ 현재의 나는 아빠의 말씀을 명심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지금은 다양한 직업을 갖고, 토픽 6급도 받아 한국으로 유학 갈 준비를 하고 있다. |
|
우리 아빠는 다른 부모들처럼 영웅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나한테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.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 아빠는 술을 마시고 엄마랑 맨날 싸우는 사람이었다. 그런 아빠를 왜 사랑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, 우리 아빠는 겉은 씩씩하지만 속은 부드러운 사람이라는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.
아빠는 나를 너무 사랑하는 것도 잘 안다. 내가 엄마한테 혼나는 날이면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그런 나만의 히어로였다. 어렸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10대에서도 나를 애기처럼 챙겨주는 사람이었다.
아빠는 나에게 한 번도 잔소리하는 사람이 아니고, 내가 실수해도 혼내지 않고 실수하게 된 이유를 먼저 물어봐 주었다. 우리 아빠랑 나는 엄마 몰래 둘만의 비밀 추억들도 만들었다. 물론 목숨을 걸고 낳아주신 엄마도 사랑한다.
대부분 사람은 아빠라는 사람은 남들이 인정하는 좋은 직장을 지고 돈 많이 벌면 아빠의 역할을 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. 물론 우리 아빠도 그렇다. 내가 용돈이 필요하면 용돈, 내 책값이 필요하면 책, 나한테는 그렇게 아낌없이 주는 한 그루의 나무였다. 그래서 나는 18살까지는 아빠만 의지하면서 살았다.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아빠 덕분에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.
그런데 어느 날 아빠가 일주일 내내 밥도 제대로 안 먹고 그렇게 좋아하는 술도 안 마시고 조금 이상했다. 엄마는 걱정하시면서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. 언니들도 얘기했지만, 아빠는 괜찮을 거라고 병원을 안 가고 그냥 침대에서 누워 있었다. 나는 불안해서 잠깐 병원에 가보셔야 된다고 말을 꺼냈을 때 아빠는 내일 가겠다고 하셔서 내 마음도 조금은 편해졌다.
아빠는 나를 서운하게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. 병원에 다녀온 결과 아빠가 암에 걸렸다고 한다. 6개월 정도만 살 수 있다고 했다. 나한테 그날은 세상이 무너지는 날이었다.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빠 침대 옆에 앉아 펑펑 울었다.
그런데 병원에 잠깐 있으면 꼭 나아질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. 그날은 내가 아빠한테 처음으로 하게 된 거짓말이다. 그러고 나서 22일 동안 아빠는 병원에 누워 계셨다. 나도 아빠 옆에 계속 있어 주었다. 22일이 지난 후 5월 29일에 아빠는 54세의 젊은 생을 마감하셨다.
나한테는 가장 큰 충격이고 마음도 절반으로 깨진 날이다. 아무리 친한 아빠와 딸이라고 해도 우리는 손도 한 번 잡은 적이 없었는데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아빠의 그 부드러운 손을 계속 잡았다. 가족과 나를 위해 24시간 내내 힘들게 일한 우리 아빠 손이 그렇게 부드러웠다니. 그것보다 더 서운한 것은 아빠가 돌아가기 전에 엄마를 불러서 그런 말을 하셨다.
“내가 죽으면 당신이랑 막내딸은 어떻겠는가?”라면서 걱정되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. 나는 직업도 없고 코로나 때문에 졸업도 못 하는 딸이라서 아빠가 걱정하신 거다.
그리고 2년이 지나 현재의 나는 아빠의 말씀을 명심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지금은 다양한 직업을 갖고, 토픽 6급도 받아 한국으로 유학 갈 준비를 하고 있다. 언니 두 명이랑 엄마도 나한테 계속 응원하고 있는 그런 우리 아빠의 자랑스러운 딸이다. 그때 아빠의 말씀이 나한테 힘이 되고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해 주었다.
아빠가 계셨을 때 나를 많이 걱정하셨는데 ‘내가 지금 이렇게 잘 자라는 것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가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?’라는 생각을 해 본다.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처럼 엄마와 언니들 그리고 나는 아빠와 동행하고 있다.
◪ 닌우웨이(빈)
양곤 거주
빛과 나눔 장학협회 장학생
한국디지털문인협회 미얀마 지부 회원
원본 기사 보기:
모닝선데이